대법원 2025. 1. 23. 선고 2024다243172 부당이득금
1. 판결의 요지
대한민국 회사인 원고는 피고가 합병한 독일 회사와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물품대금을 지급하였는데, 독일 회사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계약이 해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피고를 상대로 지급한 물품대금의 원상회복을 청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국문과 영문이 혼용된 계약상 분쟁해결에 관한 조항(이하 ‘이 사건 조항’)에 근거하여 중재합의가 있다는 본안 전 항변을 하였습니다.
제1심은 소를 각하하였으나, 원심은 이 사건 조항이 준거법에 관한 조항이면서 선택적 중재조항에 해당하고, 선택적 중재조항은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중재절차를 선택하여 그 절차에 따라 분쟁해결을 요구하고 이에 대하여 상대방이 별다른 이의 없이 중재절차에 임하였을 때에 비로소 중재합의로서 효력이 있는데, 원고가 중재합의의 존재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면서 이 사건 소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결국 이 사건 조항이 중재합의로서 효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피고의 본안 전 항변을 배척하였습니다.
대법원은 아래와 같은 법리를 설시하면서, ①
이 사건 공급계약서 문언 및 작성 경위에 비추어 특정 언어 기재 부분을 우선할 것이 아니라 양 언어로 기재된 부분을 대등한 지위에 놓고 당사자의 의사를 살펴야 한다는 원심 판결의 취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서도, ②
이 사건 조항을 통해 이 사건 공급계약과 관련한 분쟁을 중재를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전속적 중재합의가 성립하였다고 봄이 타당하고, 비록 이 사건 조항에 지정된 중재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기는 하나 장래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가 인정되는 이상 그러한 이유만으로 중재합의의 효력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중재법 제9조 제1항에 따라 법원은 이 사건 소를 각하하여야 한다고 보아, 이와 달리 판단한 원심을 파기․자판하여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였습니다.
2. 적용법리
가. 계약서에 복수의 언어가 사용되고 사용된 언어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계약의 내용을 해석하는 방법
일반적으로 계약을 해석할 때에는 형식적인 문구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고 쌍방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여야 한다(대법원 1993. 10. 26. 선고 93다2629, 2636 판결 참조). 계약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계약서의 문언이 계약 해석의 출발점이지만, 당사자들 사이에 계약서의 문언과 다른 내용으로 의사가 합치된 경우 그 의사에 따라 계약이 성립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대법원 2018. 7. 26. 선고 2016다242334 판결 참조). 당사자 사이에 계약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견이 있어 당사자의 의사 해석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계약의 형식과 내용, 계약이 체결된 동기와 경위, 계약으로 달성하려는 목적,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 거래 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 사회일반의 상식과 거래의 통념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대법원 2017. 2. 15. 선고 2014다19776, 19783 판결, 대법원 2017. 9. 26. 선고 2015다245145 판결 등 참조).
이러한 법리는 계약서가 복수의 언어본으로 작성되거나 하나의 계약서에 복수의 언어가 사용된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용된 언어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당사자의 의사가 어느 한쪽을 따르기로 일치한 때에는 그에 따르고, 그렇지 않은 때에는 위에서 본 계약 해석 방법에 따라 그 내용을 확정해야 한다(계약서가 두 개의 언어본으로 작성된 사안에 관한 대법원 2021. 3. 25. 선고 2018다275017 판결 참조).
나. ‘전속적 중재합의’의 성립 여부에 관한 판단기준 및 흠결 있는 중재합의의 효력
중재법이 적용되는 중재합의는 계약상의 분쟁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일정한 법률관계에 관하여 당사자 간에 이미 발생하였거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의 전부 또는 일부를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도록 하는 당사자 간의 합의를 말한다(중재법 제3조 제2호). 중재합의의 대상인 분쟁에 관하여 소가 제기된 경우에 피고가 중재합의가 있다는 항변을 하였을 때에는, 그 중재합의가 무효이거나 효력을 상실하였거나 그 이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아닌 한 법원은 그 소를 각하하여야 한다(제9조). 여기에서 중재법상 위 항변의 근거가 되는 중재합의는 대상 분쟁을 법원의 판결에 의하지 아니하고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이른바 ‘전속적 중재합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속적 중재합의가 성립하였는지는 당해 중재조항의 내용, 당사자가 중재조항을 두게 된 경위 등 구체적 사정을 종합하여 당사자들의 진정한 의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4. 11. 11. 선고 2004다42166 판결 등 참조). 이때 당사자들이 계약서에 중재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둔 사정은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를 추단하는 유력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한편 중재조항의 해석을 통해 장래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합의가 인정되는 한 비록 그 중재조항에 중재기관, 준거법이나 중재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중재합의로서의 효력이 인정될 수 있고(대법원 2007. 5. 31. 선고 2005다74344 판결 참조), 중재조항의 일부 문언이 모호하고 상충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중재기관이나 중재인을 지정하는 등 중재조항에 다소간의 흠결이 있다고 하여 그러한 사정만으로 유효한 중재합의가 아니라고 쉽게 단정하여서는 안된다.
정회목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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